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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1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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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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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의 삶은 언제나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 시대의 소신과는 사뭇 대비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그래서 죽음조차도 애초부터 내가 겪게 될 인간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과 결합되는 구원의 길임을 확신한다면, 과연 이 세상의 삶은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될까요?
오늘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용서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임을 일깨워 줍니다. 얼마만큼 용서하면 성숙한 인간이 되는지 묻는 베드로의 질문 속에는, 누군가를 용서함으로써 그보다 더 나은 인간임을 짐짓 드러내려는 우월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만 탈렌트라는 상상하기 힘든 금액을 탕감해 준 임금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 겨우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으로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체험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용서는, 하느님 앞에 선 나약한 내 존재 전체가 이미 용서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신비를 깨달았을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삶과 죽음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면, 내가 하느님께 진 빚을 어떻게 세상의 기준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용서는 하느님께서 하시고, 나는 그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내 이웃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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